[DYK-칼럼] 2장: 자유민주주의의 붕괴

1. 자유민주주의의 붕괴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는 자본주의적 경제 시스템과 민주주의적 정치 시스템이 결합된 형태, 즉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라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경제는 시장 경쟁과 사유재산, 이윤 극대화를 원리로 움직이고, 정치는 선거와 자유, 권력 분립의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자본주의는 부를 창출하고, 민주주의는 그 부의 분배에 정당성을 부여함으로써, 두 체제는 오랫동안 서로를 보완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적인 시스템으로 자리잡아왔다. 쉽게 말하자면 경제 성장의 동력은 자본주의가 제공했고, 시민적 참여는 민주주의가 보장했다.

그러나 이 균형은 이미 깨졌다.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강력해진 나머지, 민주주의는 이제 그 하위 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원래 민주주의는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기에, 정치권력은 시장의 탐욕을 조정하고 세금과 법률을 통해 부의 집중을 완화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자본이 정치를 통제한다. 거대 기업은 로비로 입법을 유도하고, 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장악하며, 데이터 산업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시민의 감정과 선택을 조종한다. 국가는 더 이상 ‘시민의 대표’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가진 자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권력의 하청업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모든 시민의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외치던 민주주의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여전히 제도적 형태로 남아 있지만, 그 실질은 자본의 논리에 완전히 잠식되었다. 선거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후보를 고르고 여론을 만드는 과정은 이미 자본에 의해 쉽게 설계된다. 시민은 더 이상 권력의 주체가 아니게 되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불합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톱니바퀴로 기능한다. 즉, ‘가진 자들’의 자본 증식을 위한 밑거름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표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이들이 설계한 선택지 안에서 정해진 답을 고를 뿐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본래 ‘자유로운 시장’과 ‘자유로운 시민’의 공존을 목표로 했지만, 평등을 약속했던 체제는 효율을 숭배하는 시스템으로 변했고, 민주주의는 그 본래의 이상을 잃은 채 자본주의의 윤리적 장식물로만 남았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먹어치운 것이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보장해주는 제도로 전락했고, 그 결과, ‘자본 민주주의(Capital-Democracy)’라는 새로운 봉건제가 나타나게 되었다.

2-1. 자본 민주주의의 뿌리

‘자본 민주주의(Capital-Democracy)’의 뿌리는 19세기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정치 형태는 언제나 경제적 토대 위에 세워진다”고 말하며, 자유민주주의가 결코 중립적인 제도가 아니라고 보았다. 자본을 쥔 소수가 경제를 지배하고, 경제가 다시 정치를 지배함으로써, 민주주의는 결국 자본가 계급의 이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장치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시민의 평등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본의 편에 선 체제 — 그것이 마르크스가 본 자본주의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그는 이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노동자가 권력을 되찾는 사회. 그러나 이 이상은 현실 속에서 전혀 다른 형태로 구현됐다. 소련은 관료 독재로, 중국은 시장 개방을 통한 국가 자본주의로, 북한은 폐쇄적 전체주의로 변질되었다. 사회주의는 자본의 억압을 제거했지만, 그 대신 권력의 억압을 낳았다. 마르크스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했지만, 그의 해법은 본질적 한계 앞에서 무너졌다.

본질적 한계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다. 권력을 쥔 소수는 언제나 그들의 욕심에 굴복했고, 자신들이 보유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하여 다수의 약자들의 것을 빼았았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소련처럼 붕괴되거나, 중국처럼 시장경제를 도입하거나, 북한처럼 독재자를 우상화하여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괴한 체제로 변하게 되는 등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이념 전쟁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었다.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억누르기보다 그것을 제도 안에 흡수하는 방식으로 유지되어 왔고, 그 결과 평등이라는 이상은 점차 자본의 논리에 굴복했다. 지금의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마르크스가 경고했던 구조적 모순 위에 서 있다. 평등을 내세운 제도는 자본의 손에 의해 허물뿐인 ‘자유’만을 남겼고, 그것 마저도 ‘가진 자들’에게 집중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회는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층으로 갈라졌고, 이 격차는 단순한 경제적 차이를 넘어, 존재적 위계로 굳어지고 있다.

2-2. 자본이 강력한 이유

인간은 평등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본성은 ‘우월감’에 훨씬 강하게 반응한다. “내가 쟤보다 낫다”라는 감정은 생물학적으로도 보상 회로를 자극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을 보며 무기력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SNS에 올라오는 대부분의 게시물은 더 좋은 곳, 더 좋은 물건, 더 잘 나온 모습, 즉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우월의 신호’로 가득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보면 비교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안도한다. 이 단순한 심리 구조가 사회 전반의 욕망을 결정짓고, 결국 자유민주주의 역시 이런 인간의 성향을 토대로 움직인다.

문제는 외모, 키, 신체 능력과 같은 개인의 천성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한계를 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영역에서는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한다. 그런데 자본은 다르다. 자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등한 속성’을 가진다. 물론 돈이 상대적 가치를 가진다는 점에서는 누구에게나 다르게 느껴진다. 이재용에게 100만 원은 푼돈이지만, 정재용에게 100만 원은 큰돈이다. 그러나 이재용이 햄버거를 사기 위해 지불하는 만 원과, 정재용이 햄버거를 사기 위해 지불하는 만 원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은 외모나 신체 능력과 완전히 다른 힘을 갖는다.

자본은 상대적으로 축적이 가능하고, 누적될수록 더 많은 선택지를 만들어주며,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규칙 위에서 사용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갈망하는 ‘우월감’과 ‘평등성’이라는 상반된 욕망을 동시에 만족시켜주는 유일한 요소가 자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타고난 능력이 아닌 돈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자본을 축적하는 데 집착한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결국 자유민주주의가 자본민주주의로 변질되는 환경을을 만들었다. 자본은 쉽게 누적되고, 쉽게 비교되며, 쉽게 계층을 만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산의 양은 가시적으로 잘 드러나기 때문이다. 쉼표와 0이 많은 통장 잔고와 아파트, 빌딩 같이 우리가 쉽게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들이 그 예시이다.

따라서 이것은 외모처럼 타고난 한계가 없으면서도, 신분처럼 강력한 위계를 만든다. 결국 자본은 인간의 욕망을 가장 잘 자극하는 수단이 되었고, 그 욕망이 체제를 잠식하면서 자유민주주의는 자신이 지켜야 할 평등을 스스로 포기하게 되었다.

3.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과 한계

나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란, 소수의 진정으로 현명하고 도덕적인 ‘철인(哲人)’들이 권력을 쥐되,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부정부패 없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하고, 소외된 소수에게 자원을 분배하며 균형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지혜와 선의가 결합된 지배 구조다. 내가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고대 플라톤의 ‘철인통치’와 벤담과 밀의 ‘공리주의’가 혼합된 것에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 서술했듯, 이러한 사회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나약하고, 권력을 손에 넣는 순간 그 권력에 잠식되기 때문이다. 역사가 이를 증명한다. 수많은 왕조와 국가의 군주들 가운데 ‘성군’이라 불린 이는 극히 드물었고, 대부분은 ‘암군’과 ‘폭군’으로 기억된다. 이상은 늘 존재했지만, 그것을 끝까지 지킨 인간은 거의 없었다.

이러한 한계점이 자유민주주의가 체제 전쟁에서 승자로 남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조차 시간이 흐르며 자본의 논리에 잠식되었고,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자본 민주주의’는 그 필연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권력은 탐욕을 낳고, 탐욕은 제도를 타락시킨다.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이 철인정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자본의 힘은 민주주의의 윤리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유민주주의의 문제점과 한계점들은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고, 자본의 힘에 의한 새로운 계급도는 피라미드가 아닌 K자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다. 즉, 중산층이 사라지고 ‘가진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흐름에서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해야하는 것은? 바로 1장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빠른 시일 내에 ‘가진 자들’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가 이 지구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에 자본 민주주의를 대체할 이념이 나타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후술하겠지만, 과거의 지배자들과 현재의 지배자들의 지배 방식이 직접적인 무력에 의한 지배에서 교묘하고 간접적인 지배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살짝 언급정도만 하고 넘어가자면, 이분법적 갈라치기와 마약 중독, 비대칭 무기의 등장, 감시 방식의 변화 정도가 있다. 여튼, 이러한 것들 때문에 새로운 이념의 등장은 지금 당장은 어려울 것이고, 현재 체제 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두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4. 그렇다면 AI는 새로운 ‘철인’이 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누구나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볼 것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나약해서 철인이 될 수 없었는데, 감정도 욕망도 없는 AI는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 답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AI는 아무리 뛰어나도 스스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설계된 존재이며, 그 설계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 그중에서도 자본과 권력을 독점한 ‘가진 자들’이다. AI 자체는 욕심이 없지만, AI를 설계하고 활용하는 인간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기계가 아무리 중립적이어도, 그것을 움직이는 의도는 절대 중립적일 수 없다.

역사를 보더라도 권력은 결코 스스로 절제하지 않았다. 과거 제국들이 몰락한 이유는 군사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쥔 자들이 대놓고 억압하고 착취하며 민중의 삶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봉기는 언제나 ‘삶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어려울 때’ 발생했다. 이처럼 직접적인 압박과 착취는 결국 반발과 봉기를 불러왔는데, 현대의 ‘가진 자들’은 이러한 과거 지배자들의 몰락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과거처럼 노골적으로 지배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테두리를 유지한 채, 알고리즘과 AI를 이용해 시민의 무의식 속에 패배주의를 심는다. “내가 못해서 실패했다”, “내 능력이 부족해서 이 삶을 벗어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 사는데 나만 뒤처졌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순간, 대중은 체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스스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현대 지배 구조의 핵심이다. 과거에는 ‘억압’이 지배의 도구였다면, 지금은 ‘자기비난’이 지배의 도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구조 속에서 AI는 결코 철인이 될 수 없다. 철인이란 자기 욕망을 억제하고 공동선을 위해 통치하는 존재를 의미하지만, 오늘날 AI가 작동하는 방식은 그런 이상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AI는 인간의 도덕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가진 자들’이 자신의 의도를 더욱 정교하게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증폭 장치다. 겉으로는 공정한 알고리즘과 모두를 위한 AI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데이터와 플랫폼을 장악한 극소수가 그 AI를 통해 권력을 굳히고, 대중의 사고와 행동을 본인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교묘하게 조정한다. 배급은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하고, 알고리즘은 본인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지를 제한하며, AI는 시민들이 본인의 의지를 가지고 하는 판단 자체를 대신한다. 이 구조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질문하지 않고, 체제는 점점 더 저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결국 AI는 이상사회를 실현할 철인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통제 시스템의 핵이 되어가고 있다. AI가 욕망이 없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용하는 자들이 욕망을 끝없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며, 그들이 AI를 통해 그 욕망을 실현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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